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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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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y
내가 일상 생활에서 장애를 직접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장애인이 경험하는 우리의 사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봉사활동과 여러가지 프로젝트 참여를 통해서 장애인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했지만, 내 삶에서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보니 일시적인 생각으로만 끝났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나 생각들도 반복된 일상속에서 그냥 증발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관심과 생각들이 나의 무의식에 있던 사고들에 변화를 조금씩 가져오고, 그것이 쌓여서 나중에는 내가 무언가 사회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독후감을 작성해보았다.
저자가 장애인 마크에 덮어 씌우는 프로젝트를 했다는 것을 읽고, 주위의 장애인 마크들을 관찰해보게 되었다. 저자가 만든 장애인 마크는 휠체어에 정적으로 앉아 있는 사람을 역동적인 모습으로 바꾼 것 같았다. 실제로 엘레베이터에 있는 장애인 마크는 아래와 같이 조금은 느긋하게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고,
출입구에 있는 장애인 마크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나는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은 도움을 받는 의존적 존재이고, 정적이라는 느낌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역동적인 장애인 마크나 장애인 올림픽에서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들이 이러한 무의식에 있는 장애에 대한 이미지를 깨주고 있는 것이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을 다른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1장
그의 몸이 이 세상을 만나는 방식이 바로 어맨다를 장애인으로 만들고 있다.
공통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으로, ‘자연적인’ 것이 옳은 것으로 보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레이엄이 자신의 몸과 기술을 세상과 좀 더 어울리게 만들도록 독려해야 할까? 아니면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이 아이에게 맞춰 구부리고 휘어져달라고 세상을 향해 요청해야 할까? 부적합은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성장, 노화, 질병을 거치며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한다. 과연 동일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보다는 모두에게 닥칠 부적합 상태로 인해 삶에 찾아올 위험 부담을 보편적으로 공유한다는 뜻이다. 모두가 언젠가는 보조가 필요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장애인은 10억명이나 되고, 평균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비중이 생각보다 높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평균에 속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옳은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은 애당초 부족한 부분을 도구로 채워나갔다. 사람은 삶에서 더 많은 보조 도구가 필요한데 이것은 평균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장애는 평균에 벗어난 아주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노화되면서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 문제로 볼 수 있다. 개인이 부적합을 해결하고자 하는 동시에 사회에서도 이 부적합을 같이 고민해야 한다.
2장
마이크와 크리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도구와 기술 대신 영원한 적응의 장소인 몸과 사람에 주의를 돌리라고 간청한다. 또한 테크놀로지의 정의를 확장하라고 요구한다. 단순히 ‘더 나은 것’과 ‘최고의 것’을 찾는 경쟁이 아니라 실제로 몸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 도구와 환경의 세계를 만나는 방식으로의 확장이다.
가벼운 플라스틱으로 된 이고리들은 신디의 몸에서 사라진 손가락의 필요를 줄여준다. 번거롭고 몸을 느려지게만 할 뿐인 ‘정상’ 기능의 복원 대신, 지금 몸 그대로도 서랍을 열 수 있는 바람직한 확장이다.
이 경우 과제는 작업에 필요한 섬세한 운동신경 조율을 위해 선택된 다수의 물건, 즉 하나의 ‘범용’ 팔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사용되는 여러개의 물건에 할당된다.
나도 무의식적으로 최신 기술이 접목된 의수를 통해서 '정상' 기능의 복원이 바람직한 길이라고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신디는 최신 기술의 의수를 사용해서 보통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문고리를 여는 대신에, 문고리에 케이블 타이를 걸어서 현재의 몸 그대로 서랍을 열었다. 사람의 몸은 가소성이 있고, 몸이 쇠약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사는 세상과 부적합한 상태가 될 수 있다. 장애도 그냥 사람의 몸이 변화된 것 뿐이고, 그런 것들을 우리의 세상이 포옹해주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가? 개인이 의수 같은 것으로 사회에 맞춰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최신 기술이 접목된 의수가 사이보그처럼 정상 기능을 온전히 복원할 수 있도록 발전한다면 어떻게 될까?
3장
즉, 건설환경과 그 안의 모든 구조물은 결국 인간이 내린 결정의 산물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한 사람을 위해 제작하라. 그럼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로널드 메이스 Ronald Maces는 접근 가능한 건축의 이론과 실천에 힘을 쏟은 건축가이자 휠체어 사용자로, 1985년에 보편적 디자인 Universal design이라는 용어를 대중에게 소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의 모델만이 보편적 디자인이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접근 방식일까?
나는 아돌프 케틀레와 그가 주창한 평균인의 전통에 관해, 부적합 상태로 살아가는 10억 인구에 관해, 평범한 의자의 신통한 유지력에 관해 생각했다. 이제는 평균이라는 것이 이상형의 지위를 벗어야 하지 않을까. 정녕 디자인이 평균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인지 궁금했다.
가격과 외적 디자인에 대해서만 고려되어서 만들어지는 대량 생상품이 많다. 의자에 장기간 앉아 있을 때 다양한 건강이상을 유발할 수 있다. 의자는 권위의 상징이 되었고, 산업화 시대의 작업을 위한 방식으로 사용되었고, 대량생산을 통해서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자가 애당초 사람의 몸에 맞도록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평균에 속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평균이 아니라 정규분포 곡선에서 양 끝단에 있는 사람을 관찰하고 만든 제품들이 오히려 평균에게 더 유익한 경우들도 있다. 디지털 교과서도 결국은 개인 맞춤화 학습에 의의가 있다. 학습을 잘 따라가는 평균의 학생들이 아니라, 학습에 어려움이 있는 학생들에게 맞는 시스템을 만들고, 그것이 평균의 학생들에게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4장
그러나 데프스페이스의 개념은 디자인의 특징, 즉 어떻게 보이는가가 아니라 설계하는 과정으로서 데프스페이스가 실천하려는 관심의 질에 관한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의 감각 밖에서 일어나는 문화와 소통을 구성하는 미세하고 친밀한 세부사항은 주류 바깥에서 사람들이 어떤 커뮤니티를 꾸려가고 있는지 면밀히 살피고, 대개는 보이지 않지만 오랫동안 유지된 암묵적인 지식을 공식화하라고 요구한다.
의존성을 우리 존재의 한 측면으로 인지할 때, (그렇게 된다면) 한 사회로서 우리는 의존성에 대한, 더불어 장애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의존이 어떻게 우리를 고립에서 구하고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지 인식할 때, 비로서 의존의 필요를 포용하게 될 것이다.
갤러뎃대학교 기숙사의 데프스페이스는 만들어진 결과물보다 설계하는 과정에서 세심하게 관찰하고 듣고 적용했다는 것이 큰 의미를 갖는다.
의존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느정도 다 의존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 연결되는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5장
마침내 1990년 7월 통과된 미국 장애인법은 모든 도시에서 횡단보도의 턱을 낮추고, 새로 짓는 모든 건물에 경사로가 있는 출입구 설치를 의무화했다.
이곳에서는 몸이 환경에 맞춰 변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필요를 위해 환경이 변화한다.
우리는 부적합 상태에 도달했을 때 자신의 삶을 위해 서로 상반되는 재화의 관점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치매의 경우라면, 분리된 시설에서 치료를 받거나 ‘살던 곳에서 늙어갈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호베이크 마을의 공동 생활에 혼재된 모델의 바탕에는 모 아니면 도를 넘어서는 사고가 있다.
특히 건물과 같은 것들은 한번 지어지면 변경되기가 어렵다. 1990년에 경사로가 있는 출입구 설치를 의무화되었는데, 많은 투쟁과 노력이 있어서 현재의 환경이 점진적으로 만들어졌다. 예전에 혜림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호이베이크 마을이 혜림원이랑 비슷한 모델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6장
이 두 가지에 한 가지 요인이 더 추가되어 파란불의 시간이 정해진다. 정상적인 사람은 얼마나 빨리 걷는가? 즉, 평균적인 인간이 도로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고려된다.
현대에 학교와 직장에서 설정된 속도는 건강한 사람이 이상적인 속도와 효율성으로 성취하는 생산성을 전제로 한다.
느림은 순수한 묘사의 영역을 아주 쉽게 벗어나 한 사람을 깍아내리기 위해 무기화된 시간의 단어로 변질되어 널리 쓰인다.
정상적인 기능을 갖추지 못한 아이는 시계의 가장 중요한 요구에 응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기능'의 경제적 가치가 없는 사람은 의미 있는 미래에 접근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싱가폴에서는 노인의 경우 카드를 발급받고 그 카드를 신호등에 있는 단말기에 대면 보행시간이 임시로 늘어난다고 한다. 노인을 위해서 전체 보행시간을 늘리거나 평균적인 보행시간을 적용하는 양자택일 아니라, 유연한 사고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과거에서는 자신의 높은 지위를 들어내기 위해서는 노동은 노예가 하고 자신은 여유가 많다는 것을 들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와서는 자본가들이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면서 얼마나 바쁜가가 그사람의 지위와 가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갓생'이라는 용어와 함께 부지런하게, 즉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관리, 생산성, 효율성에 많은 가치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느림'은 무능력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을까?